축제로 보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2편)

이탈리아 베로나 오페라 축제를 아십니까?

베로나는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동쪽으로는 베니스가, 서쪽으로는 밀라노와 연결되고 있어서 하나의 관광벨트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베로나가 가장 자랑하는 유적이자 축제의 공간은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아레나'라고 하는 거대한 야외무대입니다.

이 곳은 원래 고대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건축된 곳인데, 오늘날은 야외 오페라 축제가 열림으로써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아레나는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축제 공간으로서의 야외극장입니다.

또한 베로나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 도시로 더욱 유명한 도시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실화가 아님에도 베로나에는 로미오의 집, 줄리엣의 집, 줄리엣의 무덤 등이 관광 명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합니다.
이동은 기차편을 이용..2번을 갈아타야 한는 수고는 알프스를 넘어가는 경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섯시간 가량 알프스의 경관에 취해 차창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이탈리아로 넘어섭니다.
첫 목적지는 베네치아......
최종목적지는 베로나 오페라 축제이지만 어디 이탈리아까지 와서 베네치아를 들리지 않을수 있나요!
배를타고 베네치아로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탄식의 다리" "싼마르코광장" .....너무나 유명한 관광명소입니다.













115개의 섬, 177개의 크고 작은 수로, 354개의 다리, 이것이 베네치아를 이루고 있는 복합체입니다.
여행의 시작은 산 마르코 광장으로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습니다. 산타루치아 역이나 로마 광장에서 1번 수상버스를 타면 40분 정도 소요되는데 내리는 지점은 리알토 다리 혹은 산마르코광장입니다. 시간이 촉박한 경우는 산마르코광장으로 바로가도되나 가능하면 리알토다리에서 내려서 걸어가도 좋습니다.

20여분 정도 걷게 되지만 골목 골목 마다 볼거리가 많습니다. 골목이 많아 길을 잃을 걱정을 하게 되지만 유심히 건물의 벽을 보면 모든 이정표가 산 마르코와 리알토 다리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헤매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베로나로 가는 도중 피렌체에 들러 두오모, 베키오 궁전, 미켈란젤로 언덕, 우피지 미술관 등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베로나에 가면 오페라 축제 이외에도 꼭 들러 볼만한 곳이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과 관련된 관광지 들입니다.
실화는 아니지만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를 실제의 공간을 만들어 현실화 시켜놓은 것이 재미 있고 볼만하지요!
사랑의 맹세를 다닥다닥 붙여놓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연들이 미소를 짓게 합니다.




아레나는 최근 수십년 동안 세계 오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특히 <베로나 오페라 축제>는 아레나의 고대 원형극장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고 구조를 그대로 활용하여 2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연효과를 충분히 내기 위해 인공 음향과 관객석의 조명은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콜로세움의 건축술과도 연관되는 것이지만, 경기장 내부의 소리 울림 자체가 하나의 확성기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특유의 풍부한 가창력으로 관중을 압도하고 매료시키는 것이야말로 더욱 커다란 감동으로 남습니다.

축제기간 중 모든 공연은 밤 9시에 시작하고 전통적 관례에 따라 공연 시작 전에 관객들에게 촛불을 들게 하는 의식으로 오페라 지휘자와 출연자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합니다.
오페라 축제는 특히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와 푸치니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짜여져 라트라비아타, 아이다, 투란도트, 리골레토, 나부코 등이 레퍼토리로 공연되고 있으며 마리아 칼라스, 레나타 테발디, 마리오 델 모나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리카르도 무티 등 세계적 성악가들이 출연해 축제의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축제 시즌에는 매일 밤 공연에 약 15천명의 관객이 꽉 차서 오페라 축제를 즐깁니다.
모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데 관람석에는 정장과 반바지가 섞여있고, 막간엔 에스프레소나 샌드위치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것은 공연장 위로 별이 뜨고,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는 점입니다.

베로나의 아레나 오페라 축제는 콜로세움이라는 유적을 단순한 문화유산으로서가 아니라 오페라라고 하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최고의 음악예술과 긴밀히 결합시켜 이루어낸 경이로운 성공 사례입니다.







 

Posted by 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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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8월은 축제입니다.
몇 년 전 다녀온 오스트리아 짤즈브르크 음악축제, 이태리 베로나 오페라축제, 영국 에딘버러 축제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오스트리아 짤즈브르크 음악축제를 아십니까!

짤즈브르크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팔고? 살아갑니다.

고향이긴 하지만 고향에서 쫒겨나다시피 떠나서 타지에서 활동을 했지만, 그가 죽고 난 후 짤즈브르크가 모차르트의 고향이라는 점 하나만 가지고도 세계적인 음악축제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모차르트 하나로 도시전체를 디자인하고 관광상품화하고 포장되어 있습니다.

 

짤츠부르크 음악축제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명 지휘자였던 카라얀이 예술감독을 맡아 30년 이상 키움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온 축제입니다. 1920년에 시작된 잘츠부르크 축제는 그 연륜만도 80년이 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잘츠부르크가 지속적으로 자랑하고 내세워 온 특징은 세계 최고의 음악성입니다. 축제 기간 중에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인 비엔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거의 상주하면서 전속악단으로서의 역할을 맡습니다.

 


짤츠부르크 시내에는 멋진 분수와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잘 가꾸어진 미라벨 정원이 유명하고, 모차르트가 살았던 집과 세계적인 지휘자였던 카랴얀의 생가를 거쳐 짤자크강을 건너면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구시가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짤츠부르크 대성당은 정말 웅장합니다.


그 뒤로 우뚝 솟아있는 호헨 찰스부르크성에 오르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시내 외곽으로 조금만 나가면 뮤지컬 싸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빙하가 녹아내린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집니다.

오스트리아의 기후는 대체로 온화한 편이며 7,8월에는 약간 덥습니다.

산과 초원이 많아 보통 봄, 여름, 가을은 초록빛이고, 늦가을부터는 흰 눈이 쌓여 은빛으로 바뀌는데, 겨울 내내 밝은 태양빛에 흰눈이 반사되어 눈이 시리도록 부십니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모차르트 그리고 음악이 있어 아름다운 도시 짤츠부르크의 밤이 오면 세 계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과 시민들이 영화에서나 봄직한 연미복을 입고 콘서트를 보기위해 극장을 찾습니다. 음악회가 열리는 극장의 실내장식과 의자 등은 최고의 관람을 위해 음을 흡수하는 쿠션이 아닌 딱딱한 나무로 되어있습니다.

 

그들의 축제 속에 들어가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전 세계를 감동시키는 문화행사가 되었는지 한번 쯤 느껴볼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과 그것을 어떻게 세계화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도 찾아지겠지요!


Posted by 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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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까래를 아십니까!
한옥을 지을 때 도리와 도리사이, 보와 보사이를 이어주는 지붕구조의 부재료 중 하나를 서까래라고 합니다.
대개의 경우 한옥에는 반듯한 서까래를 얹는게 정석이지만 나무가 귀하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 서민들은 가끔 구불구불 휘어진 서까래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습니다.
전국에 한옥마을이라고 명명된 곳이 제법있지만
전주 한옥마을은 다른 곳과 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 움직이고 있는 살아숨쉬는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위한, 그리고 으리으리한 공간은 아니지만 담과 담사이, 골목과 골목 사이를 이어주는 사람들의 정이 느껴지는 공간이 전주 한옥마을입니다.
전주 한옥마을의 한옥들에는 유독히 이 구불구불한 서까래가 많습니다. 서민들이 급하게 지은 한옥들이고 그당시 괞찬은 나무 구하기가 그리 쉽지않아서 그랬겠거니 합니다.

근데 이게 가만히 보면 반듯한 서까래 보다 구불구불 휘어진 서까래에 더 정이 가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보나, 기둥 역시 조금 휘어지거나, 어디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녀석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모양새가 그래서 그렇지 건축구조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에 오시거들랑 구불구불 휘어진 애석한 서까래를 보면 아마도 저를 닮았으려니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오늘은 한옥마을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현재 시점의 글을 올려야 맞겠지만......언젠가 임옥상 선생이 운영하는 문화우리 소식지에 한옥마을 관련 글을 올린게 떠올라
찾아보니 있더라구요!!

아마도 더위에 조금씩 지쳐가는 요즘 때에 맞지 않는 봄소식도 그런대로 괜찮겠다 싶어 올려봅니다. 


 봄이 왔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러고 보니 길거릴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오는 봄을 꽤나 재촉하고 싶은가들 보다. 계절이 바뀌는 것이야 언제나 마음 설레는 일이지만 유독 봄이 오는 건 유난스럽고, 반갑고, 자발 맞고, 그렇다.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여인의 치맛자락이, 물오른 나뭇가지에 생명의 순환과 억척스러움을 증명해 보이는 새싹들이, 이제는 봄이라며 연신 사나이가슴에 불을 지른다. 남들 다 아는 봄소식을 혼자만 모르고 있다가 화들짝 놀란 꼴이라니........

 

여차저차 곁에 와있는 봄을 나 몰라라 하고 있던 부채도 탕감하고, 문화우리에서 던져준 숙제도 해결해 볼 요량으로 나만의 봄맞이를 나가봤다. 누구처럼 그럴싸한 일정 잡아 풀코스로 즐기는 봄맞이는 아니지만 소박하게나마 즐겨볼 요량으로 나선 길이다.

한옥마을.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다. 아는 분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뭐 그리 대단한 건축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적 전통가옥의 정형을 갖추었다고 말하기도 부끄럽다. 그저 고만고만한 한옥들이 힘겹게 어깨를 맞대고 세월을 버텨내고 있는 사람 사는 공간이다. 굳이 한옥마을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전북대학교 도시공학과 채병선 교수의 설명을 빌어보자면 “교동, 풍남동 일대의 도시한옥은 1900년 이후 호남평야에서 농업생산으로 부를 축적한 대, 소 지주와 자본을 축적한 중소상인들이 신흥자본가가 되어 전주에 모여들면서 고급주택가인 한옥집단지역을 형성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한옥마을을 한눈에 확인하려면 먼저 오목대에 올라야 한다. 64만의 도심 한가운데에 다소곳이 이어진 기와지붕들의 전경은 그래도 정겹다. 군데군데 봄을 맞아 보수작업이 한창인 곳도 보이고, 그새 새로운 이름으로 새 단장하고 앉은 건물들도 눈에 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는 한옥마을의 모습이다.

한옥마을이 정겨운 것은 그곳에 생활이 있고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기위해 한옥을 새롭게 짓고 또는 고치면서 일상 속에서의 한옥 쓰임새를 궁리하는 곳은 이곳 전주 말고는 없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일상 속에서 한참은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바로 한옥일진대 전주는 유독 한옥 짓고 사는 일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기대도 높다.

 

전주 한옥마을이라는 공간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은 역사유적과 문화시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태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경기전과 전남 제주도까지 관할하던 전주향교, 이성계가 조선창업을 만천하에 알린 오목대,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전주천의 아름다움에 반해 시를 읊었던 한벽루 등 역사유적과 함께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한옥마을 곳곳에 자리한

공예품전시관, 전통술박물관, 한옥생활체험관 등 몇몇 문화공간이 한옥마을을 문화적 환경을 갖춘 삶의 공간으로 바꿔낸 주역들이다.

오래되어 낡고 슬럼화 되어 가던 한옥마을에 몇 개의 문화시설을 세우고 도로와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나니 한옥마을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윤기 있는 삶의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한옥마을속에서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발길을 옮기다보면

한옥마을의 골목, 골목길들이 이어진다.

관광객들을 위해 배려된 공간이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만들어낸 조그만 골목들이 한옥마을 지붕들 사이로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집이 들어서고 담장이 만들어지고 최소한의 통로로서 지켜온 바로 골목이 아닌가!

계획 없이 만들어진 길이기에 골목에는 황당함과 의외성의 재미가 쏠쏠하다.

 

 

큰길에서 보면 막다른 길처럼 보여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 들어서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숨길을 이어가는 ‘내 끝을 찾아봐’ 골목이 있는가 하면,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 싶어 군침을 흘리며 발걸음을 재촉하면 이내 막다른 길이 발길을 막아버리는 황당한 ‘속았지롱’ 골목도 있다.

 

지나치는 행인의 발소리만으로도 동네사람인지 아닌지를 기가 막히게 구별해내는 견공의 텃새에 혼비백산 줄행랑을 치게 만드는 ‘함부로 들어 오지마’ 골목도 있고, 발걸음 멈추고 시어미와 며느리의 새살인지, 판소리 한대목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되는 구수한 입담에 한창이나 사생활침해의 엿듣기 재미를 주는 ‘내 이야기를 들어봐’ 골목은 제법 문학적인 맛이 있다.

 

 

위태위태 지난겨울을 견뎌준 돌담에 황토를 발라 보수를 해놓은 것이 손가락자국 선명히 드러나 보여도 아름답게 다가오는 ‘나도 화가여’ 골목은 아틀리에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골목길 거친 시멘트 바닥을 뚫고 여기 이렇게 봄이 왔노라고 얼굴 내민 들풀은 어느새 꽃을 피웠다. 그나마 풍수를 알고 양택을 잘한 팔자 좋은 들풀이 살고 있는 ‘여기가 명당’ 골목이다.

 

골목의 사전적 의미는 “동네가운데의 좁은 길, 큰길에서 동네로 들어가는 좁은 길” 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골목이 주는 의미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어린아이가 세상과 대면을 하기위해 대문을 열고 나섰을 때 처음으로 만나는 골목은 또 다른 세상을 여는 시작의 공간이며 놀이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이웃집 친구를 사귀고 비밀스런 추억을 만들며, 평생을 이어갈 소중한 기억들을 저장해나간다. 사춘기시절 마음 빼앗긴 여학생 뒤를 따라 하릴없이 서성거리다 처음으로 말을 건넨 곳도 골목이며,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설렘으로 손을 마주잡던 풋사랑의 공간도 골목이다.

이웃과 이웃이 만나 공동체를 구성하고 서로의 문화를 나누는 골목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이다. 쓰레기봉투 잘못 내놨다가 한바탕 전쟁을 치루는 싸움의 공간이고, 늦은 귀가길 얼큰한 술기운에 마주친 앞집사람의 손을 잡고 한잔만 더하자며 온정을 나누던 화합의 공간이다.

 

길은 길로 이어져 끝이 없고 골목은 길의 시작이자 끝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으로써 추억의 편린들이 금빛 기쁨의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는 공간으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으로, 골목은 우리들 삶을 윤기 있게 채워주는 힘을 지닌다.

 

한옥마을은 지금 기와지붕과 지붕이 어깨 기대고 서서 낮은 담사이로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들과 함께 새 싹을 피우고 있다.

양지바른 한옥마을 골목길에서 이름 모를 들꽃과 눈 맞추며 잊고 살았던 아련한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본다. 봄은 그렇게 와 있었다.



Posted by 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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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꼭 이맘 때......
중국 운남성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4박5일의 여정 중 2009년 8월 10일, 일년 전 오늘
오전에는 옥룡설산 해발 4,600m를 오르고 오후에 중국의 소수 민족과 장예모 감독이 만들어낸
"인상여강"을 관람했습니다.

사실 관람이라는 말이 적당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늘과 산도 구경하는 초대형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이 공연은 나시족 등 중국소수민족의 삶과 애환을 담고 있는 "대 서사시"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차마고도"의 힘겹고 기나긴 여정이 바로 이들의 삶이고, 기쁨이고, 슬픔이었던 이유입니다.

사진 몇 장으로 이 장대한 서사시를 보여 줄 수는 없지만
연일 이어지는 무더위를 눈으로 마음으로 나마 식혀보시라고 몇 컷 올려 봅니다.

아래 첨부한 글은 함께 기행을 다녀온 그 때 당시 JTV전주방송 김선경 작가가 문화저널에 올린 기행문을 붙였습니다.


소수민족, 그 빛나는 존재들

김선경 (JTV전주방송작가)

남편은 말 타고 멀리 떠났다.
한번 떠나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길. 백척간두의 차마고도.
그곳 마방에서 차를 팔아 돈을 벌어올 때까지, 아내는 집에서 남편을 기다린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아이는 자란다. 몸보다 커다란 광주리를 등에 지고 매일같이 일을 하며 남편은 기다리는 여인. 남편이 그리울 때면 아버지 같은 옥룡설산을 바라보며 마음속 기도를 올린다. 내가 죽기 전에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그렇게 평생을 일과 기도로 살아가는 여인. 나시족 여인이다.

중국 윈난성에는 나시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 거대한 한족에 비하면 이들 소수민족은 ‘새발의 피’다. 아무도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들도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차마고도 골짜기에 은둔하다시피 살면서 평생을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왔다. 글자도 자기들만의 상형문자를 만들어서 썼고, 세상을 관할하는 신은 개구리라고 믿었다. 현대인들의 눈으로 보면 미개하기 그지없는 소수민족. 차마고도가 사라지면서부터는 자신들의 손으로는 돈을 벌 줄도 몰랐고, 세상과 소통할 줄도 몰랐다. 설령 이들이 사라진다 해도 거대한 중국대륙은 아무런 미동조차 느끼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주목한 사람이 있었다. 이들에게 “당신들은 빛나는 존재”라고 일깨워준 사람이 있었다. 이들에게 배우라는 제2의 삶을 살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장이모우 감독이다. 그는 왕조가, 판웨라는 두 명의 연출자와 함께 중국 전통문화를 다룬 <인상 프로젝트>를 만들어냈다. 그 중 하나가 <인상여강>이라는 작품이다.

백제기행팀이 <인상여강>을 관람한 날은 지난 8월 10일. 해발 4,600미터의 옥룡설산을 다녀 온 직후였다. 고산을 오르면서 인공 산소를 어찌나 배불리 먹었는지 점심도 잘 먹히지 않았다. <인상여강>이 올려지는 공연장은 점심을 먹은 식당 근처에 있었다. 옥룡설산에 오르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이곳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똑같은 시간에 <인상여강>을 관람한다.
야외공연장이라 관람석은 모두 돌로 되어 있다. 무대 또한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석벽이다. 그 석벽 사이사이로 지그재그 형태의 길이 나 있다. 차마고도 백척간두의 낭떠러지 길을 표현한 것이다. 석벽 뒤로는 옥룡설산이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서 있다. 구름에 가려 언뜻 언뜻 보이는 옥룡설산은 그 자체로 천연 스크린이다. 이 단순한 무대 세트에는 윈난성 소수민족의 삶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그들의 삶은 그처럼 단순하고 그처럼 위태로웠다. 장이모우 감독은 이 세트를 아코디언 연주하듯 옆으로 늘렸다가 가운데로 모으기를 반복한다. 사람들이 흩어지면 시야가 넓어지고 사람들이 모이면 시야가 좁아진다. 마치 무대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나의 구식 디지털 자동카메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쫙쫙 늘려지는 무대.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아예 관객들 뒤편으로 360도를 내달리는 배우들. 한국의 마당극에서나 볼 법한 무대 활용을 장이모우 감독은 해내고 있었다.
무대 운용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극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도 장이모우 감독은 관객과의 소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듯 했다. 극이 시작되면 각 종족별로 나와서 무대 인사를 한다. 이를 테면 “우리는 장족입니다. 잘 봐 주십쇼!” “우리는 백족입니다, 이하동문!” 이런 식이다. 종족 인사가 끝나면 “우리는 전문배우가 아니니 혹시 실수하거나 잘못 해도 웃지 말아 달라”고 정중하게 주문을 한다. 험담을 듣기 싫어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민족 주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뒤에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실수해서 지탄을 받을 만큼 미숙한 배우들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수없이 단련되고 단련된 초일류 배우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 배우가 됐을까?

사연은 이렇다. 장이모우 감독이 인상 프로젝트 팀을 만들고 배우를 모집하자, 윈난성에 살고 있는 10개 소수민족 500명의 사람들이 주저 없이 달려왔다. 그들은 오직 ‘장이모우’라는 이름만 보고 선택을 했노라 했다. 장이모우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평생의 영광이라 했다. 그들은 장이모우 감독이 지어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고향의 가족들과도 3년간이나 떨어져서 살고 있다. 앞으로도 몇 년을 더 떨어져 살아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장이모우 감독의 위대함 때문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소수민족의 삶에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제안 받은 것은 장이모우 감독이 처음이었다. 그들의 인생에는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계적인 감독이 찾아와 “너 배우 해볼래?” 한 것이다. 그것을 거절할 만큼 간이 큰 사람이 소수민족들 가운데는 없었다. 10개 민족, 500여명의 장정과 여인네들이 짐을 싸들고 장이모우 감독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농사짓다가 죽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소수민족들. 그들에게 배우로서의 삶은 너무나 멋진 세계였다. 그래서 1년이라는 혹독한 수련기간을 거쳐 배우로 거듭난 것이다.
공연 내내 느껴지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부심으로 대사를 하고, 자부심으로 노래를 하고, 자부심으로 팔과 다리를 힘차게 내지른다. 너희들 보이지? 이게 바로 소수민족의 힘이야. 우리에겐 이런 역사가 있고 이런 문화가 있단다. 너희들은 있냐?언어의 소통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장이모우 감독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소수민족의 삶이 느껴질 수 있도록,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스토리 라인을 짰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스토리는 각 장마다 약간 짧은 듯 아쉬움이 남지만, 그만큼 빠른 호흡으로 이어져서 끝까지 감동을 준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한 동작들. 힘 있는 합창들. 그리고 눈빛으로 말하는 배우들의 열정. 그리고 그 위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장이머우 감독의 빼어난 색채감각이다. 알려진 대로 장이모우 감독은 색채의 마술사다. 소수민족들의 알록달록한 전통복식은 그 자체로 훌륭한 언어다. 하양, 노랑, 초록, 파랑, 검정 등 강렬한 원색들이 아무런 장치도 없는 무대를 화려하게 빛내준다.
그들은 공연 중에도,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들과 눈빛을 마주치려고 애를 쓴다. 관객들의 박수에 우쭐해하고, 관객들의 환호에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장이모우는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작품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혹시 그는, 소수민족들의 역사와 문화까지도 공연상품으로 팔아먹을 만큼 노회한 기획자는 아닐까? 이런 의심이 슬쩍 생겨나기도 한다. 나 말고도 누군가 이런 의심을 했는지, 왕조가 연출자가 이런 인터뷰를 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팔아 관광객을 모으는 상품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대한 야외공연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교류와 문화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농민에서 배우로 전직한 출연진들의 생각은 어떨까? 장이모우 감독의 배우가 되고 싶어서 고향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 소수민족 촌장의 마지막 대사 속에는 그들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우리는 농민입니다. 우리는 빛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작품에 마음을 바쳤습니다. 꼭 다시 와 주십시오!”이 말은 다음 공연도 꼭 보러 와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당신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호의적인 데이트 제안으로 들린다.

그들의 마지막 말은 “여기서 당신들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이다. 옥룡설산 밑에서 나를 기다리겠다니, 돌아가는 길 내내 어찌 눈에 밟히지 않으랴.
그들의 공연을 보는 내내 가슴 벅차면서도, 뭔지 모를 애잔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은,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준 이야기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수민족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다. 기행팀이 도착하기 며칠 전에도 윈난성에서는 버스테러가 발생했고 바로 옆 신장지구에서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티벳의 경우야 말해서 무엇하리. 억압받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그 현실을 바꾸려 애쓰지 않고, 그들의 과거를 문화상품으로 만들어 찬양하는 행위가 과연 완전히 온당한 것일까? 장이모우 감독도 이 물음에서 충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저런 생각들 때문에 <인상여강>을 보고 난 후 사람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한숨을 쉬었다.
삶이란, 생각하기에 따라서 얼마나 구차하면서도 또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제아무리 거대한 우주도 한 사람의 피 흘리는 고통보다 크지는 않다고 했다. 이제 거대한 중국 대륙은 한 사람의 고통에 대해 주목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부디 장이모우 감독의 <인상프로젝트>가 한 사람의 피 흘리는 고통에 대한 응시이기를, 그리하여 가장 작은 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여정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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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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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집 얘기를 해볼까?

내가 살고 있는 전주에서 80년대를 풍미했던 막걸리집 얘기를 해볼까 한다.
지금은 전주의 중심지가 관통로를 너머 중앙동 일대로 옮겨왔지만
예전에는 미원탑(알만한 분은 아는)이 있던 아카데미극장 사거리에서
동부시장 쪽으로 뚫린 경원동 일대가 전주의 번화가 이었던 적이 있다.
이곳엔 지금도 홍지서림이 있어 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두고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그 이름들...
세종집, 경원집, 한성집, 후문집,
한때 이곳 경원동 동문사거리 일대의 시인묵객들과 혈기 넘치던 대학생들이 부어라 마셔라 하던 80년대를 풍미했던 막걸리 집의 이름들이다.
먼저 세종집 얘기를 해볼까?

동부시장 사거리 건너편에 자리 잡았던 세종집은 주로 대학생들과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주인아줌마의 쌀쌀맞은 말투를 시작으로 병치회, 닭죽 등 한 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안주들은 언제나 공짜.
막걸리 값만 지불하면 안주는 정말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이 집에선 덩치 큰 주인아줌마와는 자못 대조적으로 보이는 비쩍 마른 몸과 주독이 올라 딸기코가 되어버린 주인 아저씨가 언제나 그렇듯 아줌마의 끊기지 않는 잔소리를 들으며 아줌마는 주방에서 아저씨는 손님들 사이를 부산하게 움직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저씨는 손님들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절묘하게 아줌마의 눈을 피해가며 한잔 두잔 받아 마셔 저녁 무렵이면 벌겋게 취기가 올라 갈 짖자 걸음으로 안주접시를 위태위태하게, 하지만 한번의 실수도 없이 잘도 날랐다.
어느 핸가 군에 있다 휴가 나와 들린 세종집에서 주인아저씨는 " 내일이면 이제 이 짓도 그만이야" "자식놈들도 다 키웠고 몸도 안 좋고 해서 그만 둘 라고" 하며 긴 담배연기를 내뿜던 아저씨의 모습을 끝으로 세종 집은 자취를 감추었다.
세종집 아줌마 아저씨
어디선가 건강하시죠

다음으로 동문사거리에 손바닥만하게 자리 잡은 경원집 얘기를 해볼까?

경원집은 지금까지 문을 열고 있는 유일한 막걸리 집이다.
몇해전인가 주인은 한번 바뀌었다.
이 집은 정말 손바닥만하다.
발디딜 틈도 없는 주방을 빼고 나면 테이블은 고작 서너 개가 전부이지만,
지금도 그 곳엔 빈자리가 없다.

주로 경원동 일대에 직장을 다니던 아저씨들이 퇴근 후에 피로를 풀고,
스트레스를 풀고, 억압을 풀고, 자유를 꿈꾸던 경원집은 그날 받아놓은 막걸리가 떨어지면 그 시간이 문 닫는 시간이었다. 대개 9시에서 11시면 술은 동이나서 주당들은 툴툴거리며 자리를 떠야 했다.
자리가 워낙 좁다보니 주방 앞에 서서 선 채로 막걸리 사발을 들이켜던 술꾼들의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유리창으로 된 미닫이 문 넘어 보이던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과 부산한 주인아줌마의 손놀림, 왁자지껄한 술꾼들의 실루엣이 아련한 기억 속에 떠오른다.
주인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이 집은 정통막걸리집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집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사진 찍는 이흥재선생님!
언제 경원집에서 막걸리 한잔하며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를
막걸리 집 이야기들을 사진 속에 한번 담아 보십시다.


다음으로 한성집
지금은 없어진 아리랑제과소 사거리에 자리잡은 한성집은 이상커피숍에
진을 치고 살던 글쓰는 사람들과 소극장에서 연극을 하던 연극인들,
미술가들, 그리고 나이 많은 원로 서예가들이 자주 찾던 막걸리 집이다.
한마디로 예술쟁이들의 아지트 였다고나 할까?
거의 매일 들러 몇순배 안 되는 술을 마시고 조용히 일어나시던 원로 서예가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젊은 층들은 피우던 담배도 끄고 시끄럽게
늘어놓던 농지거리도 조금 목소리를 낮춰 예를 갖췄다.
나역시 군대 제대후 거의 몇 년 동안 이상커피숍과 한성집을 오가며 세월을 보내던 적이 있다.
그때 친구녀석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주인 아주머니 자식녀석 대학교
학자금은 우리가 마신 술값으로 치르고도 남는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한성집 가득히 담배 연기를 뿜으며 문학을 얘기하고, 예술을 얘기하고, 삶을 얘기하던 주당 분들 잘들 사시는지......
성공했으면 막걸리 한잔 사슈?????
한성집도 동문사거리 경원동의 몰락과 함께 어느 날 자취를 감춰 버렸다.
홍지서림 아래 쪽 골 목안에 있던 후문집은 주로 대학생들의 모임장소였다.
술장사하면서 상냥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 집 주인 아저씨는 솔찮히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젊은 대학생들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이만한 안주에 술까지 마실 수 있는 장소로는 후문집 만한 곳도 드물었던 성싶다.
이 곳엔 언제나 치기 넘치는 대학생들의 목청 높은 논쟁과 웃음소리,
탁자를 두들기며 불러제끼는 운동가요가 이 집의 분위기를 활기차게 해주었다.
화장실엔 언제나 누군가가 "오늘 아침에 내가 뭘 먹었는지 가리켜 줄께" 하며 남겨놓은 증거물들이 지저분했고 처음 마신 술에 취해 눈물에 콧물까지 흘려가며 술주정을 해대 던 어린 여대생들의 비틀거림이 있었다.
젊은 날의 열정과 좌절을 막걸리 한잔에 풀어내던 후문집은 그 시대를
살던 젊은이들의 유일한 탈출구 중에 한군데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사라진 그곳 한성집, 후문집, 세종집, 그리고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경원집.
이 이름들 속에 얼마나 많은 추억과 한숨과 눈물과 기쁨들이 묻어 있을까? 보고싶다 그 사람들. 마시고 싶다 그 집의 그 막걸리를........
한시대의 뒤안길을 차분히 정리 해 주던 그리운 막걸리집들이 하나씩
없어져 갈 때마다 왠지 서글퍼지는 건 내가 술을 좋아하는 술꾼이어서
만은 아닐 게다.
오늘밤 어디 가서 막걸리나 한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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