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8.14 구불구불 휘어진 한옥 서까래를 아십니까! by 솔소리 8
  2. 2009.08.05 동문사거리 막걸리집에 대한 몇가지 단상 by 솔소리 10
  3. 2009.05.08 점점 닮아가는 두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 by 솔소리 27

서까래를 아십니까!
한옥을 지을 때 도리와 도리사이, 보와 보사이를 이어주는 지붕구조의 부재료 중 하나를 서까래라고 합니다.
대개의 경우 한옥에는 반듯한 서까래를 얹는게 정석이지만 나무가 귀하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 서민들은 가끔 구불구불 휘어진 서까래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습니다.
전국에 한옥마을이라고 명명된 곳이 제법있지만
전주 한옥마을은 다른 곳과 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 움직이고 있는 살아숨쉬는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위한, 그리고 으리으리한 공간은 아니지만 담과 담사이, 골목과 골목 사이를 이어주는 사람들의 정이 느껴지는 공간이 전주 한옥마을입니다.
전주 한옥마을의 한옥들에는 유독히 이 구불구불한 서까래가 많습니다. 서민들이 급하게 지은 한옥들이고 그당시 괞찬은 나무 구하기가 그리 쉽지않아서 그랬겠거니 합니다.

근데 이게 가만히 보면 반듯한 서까래 보다 구불구불 휘어진 서까래에 더 정이 가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보나, 기둥 역시 조금 휘어지거나, 어디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녀석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모양새가 그래서 그렇지 건축구조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에 오시거들랑 구불구불 휘어진 애석한 서까래를 보면 아마도 저를 닮았으려니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오늘은 한옥마을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현재 시점의 글을 올려야 맞겠지만......언젠가 임옥상 선생이 운영하는 문화우리 소식지에 한옥마을 관련 글을 올린게 떠올라
찾아보니 있더라구요!!

아마도 더위에 조금씩 지쳐가는 요즘 때에 맞지 않는 봄소식도 그런대로 괜찮겠다 싶어 올려봅니다. 


 봄이 왔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러고 보니 길거릴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오는 봄을 꽤나 재촉하고 싶은가들 보다. 계절이 바뀌는 것이야 언제나 마음 설레는 일이지만 유독 봄이 오는 건 유난스럽고, 반갑고, 자발 맞고, 그렇다.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여인의 치맛자락이, 물오른 나뭇가지에 생명의 순환과 억척스러움을 증명해 보이는 새싹들이, 이제는 봄이라며 연신 사나이가슴에 불을 지른다. 남들 다 아는 봄소식을 혼자만 모르고 있다가 화들짝 놀란 꼴이라니........

 

여차저차 곁에 와있는 봄을 나 몰라라 하고 있던 부채도 탕감하고, 문화우리에서 던져준 숙제도 해결해 볼 요량으로 나만의 봄맞이를 나가봤다. 누구처럼 그럴싸한 일정 잡아 풀코스로 즐기는 봄맞이는 아니지만 소박하게나마 즐겨볼 요량으로 나선 길이다.

한옥마을.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다. 아는 분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뭐 그리 대단한 건축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적 전통가옥의 정형을 갖추었다고 말하기도 부끄럽다. 그저 고만고만한 한옥들이 힘겹게 어깨를 맞대고 세월을 버텨내고 있는 사람 사는 공간이다. 굳이 한옥마을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전북대학교 도시공학과 채병선 교수의 설명을 빌어보자면 “교동, 풍남동 일대의 도시한옥은 1900년 이후 호남평야에서 농업생산으로 부를 축적한 대, 소 지주와 자본을 축적한 중소상인들이 신흥자본가가 되어 전주에 모여들면서 고급주택가인 한옥집단지역을 형성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한옥마을을 한눈에 확인하려면 먼저 오목대에 올라야 한다. 64만의 도심 한가운데에 다소곳이 이어진 기와지붕들의 전경은 그래도 정겹다. 군데군데 봄을 맞아 보수작업이 한창인 곳도 보이고, 그새 새로운 이름으로 새 단장하고 앉은 건물들도 눈에 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는 한옥마을의 모습이다.

한옥마을이 정겨운 것은 그곳에 생활이 있고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기위해 한옥을 새롭게 짓고 또는 고치면서 일상 속에서의 한옥 쓰임새를 궁리하는 곳은 이곳 전주 말고는 없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일상 속에서 한참은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바로 한옥일진대 전주는 유독 한옥 짓고 사는 일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기대도 높다.

 

전주 한옥마을이라는 공간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은 역사유적과 문화시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태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경기전과 전남 제주도까지 관할하던 전주향교, 이성계가 조선창업을 만천하에 알린 오목대,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전주천의 아름다움에 반해 시를 읊었던 한벽루 등 역사유적과 함께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한옥마을 곳곳에 자리한

공예품전시관, 전통술박물관, 한옥생활체험관 등 몇몇 문화공간이 한옥마을을 문화적 환경을 갖춘 삶의 공간으로 바꿔낸 주역들이다.

오래되어 낡고 슬럼화 되어 가던 한옥마을에 몇 개의 문화시설을 세우고 도로와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나니 한옥마을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윤기 있는 삶의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한옥마을속에서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발길을 옮기다보면

한옥마을의 골목, 골목길들이 이어진다.

관광객들을 위해 배려된 공간이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만들어낸 조그만 골목들이 한옥마을 지붕들 사이로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집이 들어서고 담장이 만들어지고 최소한의 통로로서 지켜온 바로 골목이 아닌가!

계획 없이 만들어진 길이기에 골목에는 황당함과 의외성의 재미가 쏠쏠하다.

 

 

큰길에서 보면 막다른 길처럼 보여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 들어서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숨길을 이어가는 ‘내 끝을 찾아봐’ 골목이 있는가 하면,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 싶어 군침을 흘리며 발걸음을 재촉하면 이내 막다른 길이 발길을 막아버리는 황당한 ‘속았지롱’ 골목도 있다.

 

지나치는 행인의 발소리만으로도 동네사람인지 아닌지를 기가 막히게 구별해내는 견공의 텃새에 혼비백산 줄행랑을 치게 만드는 ‘함부로 들어 오지마’ 골목도 있고, 발걸음 멈추고 시어미와 며느리의 새살인지, 판소리 한대목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되는 구수한 입담에 한창이나 사생활침해의 엿듣기 재미를 주는 ‘내 이야기를 들어봐’ 골목은 제법 문학적인 맛이 있다.

 

 

위태위태 지난겨울을 견뎌준 돌담에 황토를 발라 보수를 해놓은 것이 손가락자국 선명히 드러나 보여도 아름답게 다가오는 ‘나도 화가여’ 골목은 아틀리에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골목길 거친 시멘트 바닥을 뚫고 여기 이렇게 봄이 왔노라고 얼굴 내민 들풀은 어느새 꽃을 피웠다. 그나마 풍수를 알고 양택을 잘한 팔자 좋은 들풀이 살고 있는 ‘여기가 명당’ 골목이다.

 

골목의 사전적 의미는 “동네가운데의 좁은 길, 큰길에서 동네로 들어가는 좁은 길” 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골목이 주는 의미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어린아이가 세상과 대면을 하기위해 대문을 열고 나섰을 때 처음으로 만나는 골목은 또 다른 세상을 여는 시작의 공간이며 놀이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이웃집 친구를 사귀고 비밀스런 추억을 만들며, 평생을 이어갈 소중한 기억들을 저장해나간다. 사춘기시절 마음 빼앗긴 여학생 뒤를 따라 하릴없이 서성거리다 처음으로 말을 건넨 곳도 골목이며,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설렘으로 손을 마주잡던 풋사랑의 공간도 골목이다.

이웃과 이웃이 만나 공동체를 구성하고 서로의 문화를 나누는 골목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이다. 쓰레기봉투 잘못 내놨다가 한바탕 전쟁을 치루는 싸움의 공간이고, 늦은 귀가길 얼큰한 술기운에 마주친 앞집사람의 손을 잡고 한잔만 더하자며 온정을 나누던 화합의 공간이다.

 

길은 길로 이어져 끝이 없고 골목은 길의 시작이자 끝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으로써 추억의 편린들이 금빛 기쁨의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는 공간으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으로, 골목은 우리들 삶을 윤기 있게 채워주는 힘을 지닌다.

 

한옥마을은 지금 기와지붕과 지붕이 어깨 기대고 서서 낮은 담사이로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들과 함께 새 싹을 피우고 있다.

양지바른 한옥마을 골목길에서 이름 모를 들꽃과 눈 맞추며 잊고 살았던 아련한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본다. 봄은 그렇게 와 있었다.



Posted by 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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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집 얘기를 해볼까?

내가 살고 있는 전주에서 80년대를 풍미했던 막걸리집 얘기를 해볼까 한다.
지금은 전주의 중심지가 관통로를 너머 중앙동 일대로 옮겨왔지만
예전에는 미원탑(알만한 분은 아는)이 있던 아카데미극장 사거리에서
동부시장 쪽으로 뚫린 경원동 일대가 전주의 번화가 이었던 적이 있다.
이곳엔 지금도 홍지서림이 있어 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두고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그 이름들...
세종집, 경원집, 한성집, 후문집,
한때 이곳 경원동 동문사거리 일대의 시인묵객들과 혈기 넘치던 대학생들이 부어라 마셔라 하던 80년대를 풍미했던 막걸리 집의 이름들이다.
먼저 세종집 얘기를 해볼까?

동부시장 사거리 건너편에 자리 잡았던 세종집은 주로 대학생들과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주인아줌마의 쌀쌀맞은 말투를 시작으로 병치회, 닭죽 등 한 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안주들은 언제나 공짜.
막걸리 값만 지불하면 안주는 정말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이 집에선 덩치 큰 주인아줌마와는 자못 대조적으로 보이는 비쩍 마른 몸과 주독이 올라 딸기코가 되어버린 주인 아저씨가 언제나 그렇듯 아줌마의 끊기지 않는 잔소리를 들으며 아줌마는 주방에서 아저씨는 손님들 사이를 부산하게 움직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저씨는 손님들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절묘하게 아줌마의 눈을 피해가며 한잔 두잔 받아 마셔 저녁 무렵이면 벌겋게 취기가 올라 갈 짖자 걸음으로 안주접시를 위태위태하게, 하지만 한번의 실수도 없이 잘도 날랐다.
어느 핸가 군에 있다 휴가 나와 들린 세종집에서 주인아저씨는 " 내일이면 이제 이 짓도 그만이야" "자식놈들도 다 키웠고 몸도 안 좋고 해서 그만 둘 라고" 하며 긴 담배연기를 내뿜던 아저씨의 모습을 끝으로 세종 집은 자취를 감추었다.
세종집 아줌마 아저씨
어디선가 건강하시죠

다음으로 동문사거리에 손바닥만하게 자리 잡은 경원집 얘기를 해볼까?

경원집은 지금까지 문을 열고 있는 유일한 막걸리 집이다.
몇해전인가 주인은 한번 바뀌었다.
이 집은 정말 손바닥만하다.
발디딜 틈도 없는 주방을 빼고 나면 테이블은 고작 서너 개가 전부이지만,
지금도 그 곳엔 빈자리가 없다.

주로 경원동 일대에 직장을 다니던 아저씨들이 퇴근 후에 피로를 풀고,
스트레스를 풀고, 억압을 풀고, 자유를 꿈꾸던 경원집은 그날 받아놓은 막걸리가 떨어지면 그 시간이 문 닫는 시간이었다. 대개 9시에서 11시면 술은 동이나서 주당들은 툴툴거리며 자리를 떠야 했다.
자리가 워낙 좁다보니 주방 앞에 서서 선 채로 막걸리 사발을 들이켜던 술꾼들의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유리창으로 된 미닫이 문 넘어 보이던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과 부산한 주인아줌마의 손놀림, 왁자지껄한 술꾼들의 실루엣이 아련한 기억 속에 떠오른다.
주인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이 집은 정통막걸리집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집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사진 찍는 이흥재선생님!
언제 경원집에서 막걸리 한잔하며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를
막걸리 집 이야기들을 사진 속에 한번 담아 보십시다.


다음으로 한성집
지금은 없어진 아리랑제과소 사거리에 자리잡은 한성집은 이상커피숍에
진을 치고 살던 글쓰는 사람들과 소극장에서 연극을 하던 연극인들,
미술가들, 그리고 나이 많은 원로 서예가들이 자주 찾던 막걸리 집이다.
한마디로 예술쟁이들의 아지트 였다고나 할까?
거의 매일 들러 몇순배 안 되는 술을 마시고 조용히 일어나시던 원로 서예가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젊은 층들은 피우던 담배도 끄고 시끄럽게
늘어놓던 농지거리도 조금 목소리를 낮춰 예를 갖췄다.
나역시 군대 제대후 거의 몇 년 동안 이상커피숍과 한성집을 오가며 세월을 보내던 적이 있다.
그때 친구녀석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주인 아주머니 자식녀석 대학교
학자금은 우리가 마신 술값으로 치르고도 남는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한성집 가득히 담배 연기를 뿜으며 문학을 얘기하고, 예술을 얘기하고, 삶을 얘기하던 주당 분들 잘들 사시는지......
성공했으면 막걸리 한잔 사슈?????
한성집도 동문사거리 경원동의 몰락과 함께 어느 날 자취를 감춰 버렸다.
홍지서림 아래 쪽 골 목안에 있던 후문집은 주로 대학생들의 모임장소였다.
술장사하면서 상냥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 집 주인 아저씨는 솔찮히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젊은 대학생들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이만한 안주에 술까지 마실 수 있는 장소로는 후문집 만한 곳도 드물었던 성싶다.
이 곳엔 언제나 치기 넘치는 대학생들의 목청 높은 논쟁과 웃음소리,
탁자를 두들기며 불러제끼는 운동가요가 이 집의 분위기를 활기차게 해주었다.
화장실엔 언제나 누군가가 "오늘 아침에 내가 뭘 먹었는지 가리켜 줄께" 하며 남겨놓은 증거물들이 지저분했고 처음 마신 술에 취해 눈물에 콧물까지 흘려가며 술주정을 해대 던 어린 여대생들의 비틀거림이 있었다.
젊은 날의 열정과 좌절을 막걸리 한잔에 풀어내던 후문집은 그 시대를
살던 젊은이들의 유일한 탈출구 중에 한군데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사라진 그곳 한성집, 후문집, 세종집, 그리고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경원집.
이 이름들 속에 얼마나 많은 추억과 한숨과 눈물과 기쁨들이 묻어 있을까? 보고싶다 그 사람들. 마시고 싶다 그 집의 그 막걸리를........
한시대의 뒤안길을 차분히 정리 해 주던 그리운 막걸리집들이 하나씩
없어져 갈 때마다 왠지 서글퍼지는 건 내가 술을 좋아하는 술꾼이어서
만은 아닐 게다.
오늘밤 어디 가서 막걸리나 한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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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설산 아래, 우리를 기다리는 나시족 여인  (16) 2009.08.10
Posted by 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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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딸 아이와 안 사람은 먼저 집을 나서고
여섯 배기 아들녀석 유치원 차를 태우려고 집을 나서려다 집안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먼저 딸 아이 방 문을 여니 이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열 한살 먹은 딸 아이는 저희 반에서 제일 키가 크고 제법 어른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린애 입니다.
저희 부부는 맞벌이라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 자라며 꼼꼼하고 깔끔한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법도 하련만 치우고 정리하는 데는 영 소질이 없는가 봅니다.
그리고 나서 안방 문을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랬습니다.

아마도 할머니가 보셨다면 "뱀이 허물 벗어논 것 같다."고 하셨을 겁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고등학교 1학년에 만나 서른 세 살에 결혼에 골인 하기까지 참 긴 세월동안 안사람과 만나왔지만 집안에서의 문화를 서로 공유할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 초기에는 많이 다투기도 했었지요!
상황은 이랬습니다.
하루에 두 번 이상 걸레 청소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집안에서 자란 저와, 집안 청소는 명절 행사 정도로 생각하는 집안에서 자란 안사람의 문화는 서로 이해 할 수 없었지요!
뭐 어떤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막연한 스트레스..........

상당히 개방적인 집안의 분위기에서 자란 저는 결혼 초부터 어렵고 힘든 집안 일들은 제가 하는게 옳다고 생각하고, 집안 청소 역시 손수 해결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무슨 일이 있거나 어딜 다녀와서 청소를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당연히 안 사람이 청소를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겁니다.
한번은 언제까지 청소가 안 되나 보자 하고 지내 봤더니 일주일이 넘도록 집안은 치워질 줄을 몰랐지요!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왜 청소 안하는데?"
"응 그거 당신 일이잖아!"
"뭐라고? 당신 힘들까봐 내가 도와준거지!!"
"무슨 소리야 도와주다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뭐 나는 그렇게 청소 안해도 살만해"
..........................
그러다가 결국 대판 싸웠지요!!

결혼 11년차가 된 지금은 서로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길들여지고 뭐 그런데로 살만합니다.
제가 제시했던 결혼 공약 중 1순위인 '아침 밥  꼭 챙겨주기'의 약속은 안사람이 무슨일이 있어도 지켜주고
뭐 나는 그 외의 거의 모든 일을 하고 있지요! 청소, 빨레, 집안정리, 기타등등......

조금 억울할 법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문화의 차이고, 선택하는  문제이기에.......
안 사람은 대단히 창조적이고 활동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타입입니다. 방송작가로 십년 넘게 생활하다가 지금은 전문직공무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방송계의 퓰리처상이라는 피버디상을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받았던 역량있는 작가였고, 지금도 전주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조금 어지르고 살고, 치우고 정리하는데 게으르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유전자가 딸 아이에게도 전달되나 봅니다.
할머니와 제가 공동전선을 펼치며 깔끔하고 정돈 잘하는 아이로 키울려고 참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그게 맘 같이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두 여자의 방과
벗어 놓고 간 흔적을 보며 혼자서 참 많이 웃었습니다.
피는 못 속이는 구나! 
어쩌겠어요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아쉬운 제가 치우고 정리하고 살아야지요!!
그래도 지 엄마 닮아서 그런지 제법 똑소리나는 성격에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어른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답니다.
이거 오늘 팔불출 제대로 된거 아닌가 싶네요!!

그래도 점점 닮아가는 두 여자와의 사랑이 오늘도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근데 이글과 사진 우리 안사람이 보면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블로그 패쇄해야할지도............  
암튼 오늘은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식 보러 갑니다.



추신 : 요즘 안 사람은 전통만이 살 길이라며 고추장, 된장, 간장 담고 사는 게 앞으로의 꿈이랍니다. 그래서 단독주택자리도 물색하고 있구요!! 맞는 말이긴 하고 저 역시 좋긴 한데....평소 안 사람의 성격을 봐서는 그 모든 일이 저의 일이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려... 
전통 좋지요! 전통문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도시 전주에 사는게 행복합니다.................
Posted by 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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